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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 단상] 발효를 위한 소통의 미학. 항아리 다시 보기
작성일 2016.11.09 조회수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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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흔히 보이는 것들로 뫼비우스적, 그 이상의 상상 여행을 하려 한다. 주변의 사물들엔 저마다 독특한 내력이 숨어 있고 어떻게 빚느냐에 따라 보석이 되기도 하고 나침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출발한 여행의 과정에 어떤 빛깔의 풍경이 나타날지, 그 끝이 어디까지 다다를지 필자 자신도 설레인다. 인문학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 메타적 성찰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사물과 풍경, 시대와 인문을 두루 관통하면서 색다르면서도 유익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개, 소, 돼지, 양, 말 등등은 야생에서 가축화된 것이다. 그 시기가 동물마다 다른데 개의 경우는 대략 일만년 이전이다. 동물의 가축화와 비슷한 과정을 곡류도 거친다. 콩 역시 야생콩에서 중간형을 거쳐 재배콩으로 변해 밭에서 지금 자라고 있는 것이다.  
완두, 강낭콩, 검은콩, 흰콩, 나물콩, 서리태, 청태, 장콩 등등 콩의 종류도 다양하다. 그 중 단백질이 풍부한 장콩 류가 메주의 재료로 쓰인다. 밭에서 수확한 콩을 솥에 삶은 다음에 절구에 찧는 일은 예전엔 흔한 풍경이었다.  
찧어지면 대개 벽돌처럼 네모나게 빚어진다. 그렇게 되어진 메주에 볏짚을 두르는데 단지 공중에 매달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볏짚이 메주에 닿는 부분에 곰팡이가 핀다. 메주가 알맞게 띄워지면 퉁풍 잘 되는 그늘에 매달아 말린다. 마지막엔 햇볕에 쬐여 바짝 말린다.


간장을 만들기 위해선 항아리 역시 준비되어야 한다. 항아리는 토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득한 시절에 불이 발견되었고 시간이 흘러 아궁이가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음식의 저장이나 요리를 위해 토기가 필요했다. 고대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들은 돌도끼나 돌칼, 찍개 등등에 이어 토기의 전시가 거의 필수로 되어 있다. 

아궁이가 불을 가두는 그릇이라고 한다면 토기는 음식을 가두는 그릇이다. 자연 상태의 불을 가두어 보존하는 아궁이나 자연 상태의 먹거리를 가두어 보존하고 가공하는 토기는 가둔다는 의미에선 동일선상에 있다. 그 ‘가둠’의 개념은 자연 상태의 일부 동물과 식물의 야성을 변형시키는 가축화나 재배화마저 꿰뚫는다. 떠돌아 다니며 수렵과 채취를 하던 구석기 시대를 벗어나 정착해 농사를 짓는 신석기 시대의 생활방식과도 어울린다. 

그것 외에 달리 뭐가 있겠는가. 펼쳐진 자연 속에서 장구한 기간 동안 살아가다가 한계에 부딪혔는지 인류는 스스로를 가두고 주변도 가두는 생활로 접어든다. 움집을 짓는 것, 경작할 땅을 확보하는 것도 같은 개념에 속하며 아궁이와 토기도 그럴 것이다. 불은 그 이전의 시절처럼 역시 중요했고, 먹고 살기 위해 음식을 저장하고 요리하는 데에 필요한 토기도 중요한데 생활 양식이 바뀌었기에 그에 따라 적절하게 변형되거나 생성되었을 것이다. 

가두는 것, 모으는 것, 안과 밖의 개념, 분리의 개념 등등은 떠돌며 살며 둥굴이나 천막에 살던 시절에도 있었음직 하다. 그 구석기 시대의 유물인 알타미라 동물 벽화는 선, 둥그스름한 원형 등으로 그려지고 대상물의 안과 밖이 색깔을 달리해 칠해져 그런 추론에 대한 단서가 될 듯도 하다.

주요 거주지인 동굴이나 천막, 먹거리 동물을 잡기 위해 무리 지어 조여갈 때의 안과 밖의 느낌, 동물을 도살하여 내장을 꺼낼 때의 느낌, 개울에 흐르는 물을 떠 먹기 위해서나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을 받아 먹기 위해 두 손을 접시마냥 모여 만들 때의 느낌, 동물들에게도 본능적으로 있는 영역이라는 것, 인간의 내부에 안과 밖 등등의 선험적인 범주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그 있음의 가능성들을 봐도 그럴 것 같다. 

울타리, 마을, 부족도 그런 개념의 연속상에 있을 것이다. 우물, 저수지, 댐, 시장, 국가, 해자, 감옥 등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냄비, 락엔락 용기, 컵, 욕조 등등도 그럴 것이다. 사랑에 가두는 속성이 생겨나거나 강해진 것도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득한 시절에 형성되었음직한 그런 개념에도 가닿을 것 같다. 구석기 시대의 크로마뇽인들은 이 정도가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인지 능력, 언어 상상력, 주술이나 초월적인 상징의 세계에 살았다. 신석기에 들어서 정착생활을 하게 됨으로서 인류가 스스로를 가두고 주변을 가두는 생활 양식을 구조화하게 됨에 따라 가둠과 관련된 개념들은 보다 강화되었거나 단절적 연속성을 띨 것이다. 

그렇게 가두는 그릇으로서의 토기가 발전되어 도기, 옹기, 자기 등등으로 다채로운 변화를 겪는데 항아리는 그 중 옹기에 속하는 물건이다. 

이 항아리에 이미 띄운 메주가 들어가고 소금물로 채워진다. 숯은 여기에도 들어간다. 고추와 대추도 들어간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항아리 안의 세계가 온도와 공기, 미생물 등등의 작용을 받으며 발효가 되어간다. 건더기를 꺼내 치대서 숙성하면 된장이 되고 남은 소금물을 숙성하면 간장이 된다. 

그렇게 얻어진 간장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발효 식품의 하나이다. 항아리 속에서의 길고 긴 시간을 통과하며 그윽해진다. 숯은 유해 물질을 흡착하는 동시에 탄소 외에도 미네랄을 포함하고 있기에 그것을 투여해준다. 고추는 살균 작용을 하고 대추는 붉은 색으로서 액을 막는다. 즉 과학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이 함께 버무려져 거무스레하면서도 그윽한 빛깔의 예술품으로 빚어지는 것이다. 심연을 닮은 그것이 국을 끓이거나 두부나 멸치 조림을 할 때, 각종 밑반찬을 만들 때도 필수로 들어간다. 음식에 간이 배게 한다. 

간장을 비롯한 그런 장류가 음식의 기본이 된 문화여서 그런지 아시아 그중 특히 우리나라에서 발효의 가치는 문화의 중심 키워드 중 하나가 되었다. 가야금 산조나 아쟁, 해금 산조에도 발효의 맛이 배어 있다. 판소리나 민요, 김홍도나 신영복의 그림, 다산이나 허난설헌의 문장에도 발효의 미학이 스며 있다. 고찰이나 전통 가옥, 선조들의 품새나 풍류에도 그런 멋이 감겨 있다.

그런 우리나라가 언제부턴가 발효라는 좋은 가치는 점점 쇠퇴해가고 부패의 내음이 진동하게 되었다. 정치계, 종교계, 경제계, 교육계 문화계 등등 사회 전반에 걸쳐 극심한 부패가 횡횡한다는 것은 이젠 상식이다. 안타깝고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에 대해 다채로운 논의가 가능하겠지만 나는 아주 소박한 차원에서 항아리를 떠올려 본다. 아궁이와 더불어 인류의 역사에서 원형질에 가까운 토기의 일종인 항아리를.

항아리엔 가둠의 미학이 있다. 가두되 가두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항아리 안의 소금물, 메주, 숯, 고추, 대추, 미생물의 범벅은 항아리 바깥의 온도와 공기, 낮과 밤에 은밀히 열려 있다. 그 바깥의 조력이 없다면 부패 즉 썩어버릴 것이다. 바깥이라 함은 음침한 공간이 아니라 조금 비약해 말하자면 우주적 시공이다. 우주의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무수한 것들이 은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항아리의 입구도 한지나 천으로 싼다. 모두 투과성 물건이다. 뚜껑도 허술하다. 빈 틈이 존재하기에 그 건강한 외부와의 소통이 가능하다. 조응, 창조가 일어난다. 항아리 안의 세계와 그 바깥의 세계가 하나의 천연 공장이 되어 발효의 연금술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궁이 안의 불이 그 바깥의 바람이나 산소 없으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집도, 울타리도, 마을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열림 없이 가두기만 하면 사도 세자를 가둔 뒤주처럼 죽임의 관이 될 수 있다. 뒤주 역시 가두는 그릇으로서의 아궁이, 항아리, 솥, 절구 등과 같은 류에 속하지만 그 안에 어떤 존재를 집어 넣고 못으로 탕탕 치어 외부와의 소통을 멸절시킨 의미에서의 뒤주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현 정치, 교육, 종교 등등은 항아리 구조라기보단 못질을 한 뒤주의 구조인 면이 강할 것이다. 양면성이 공존하겠지만 그렇게 보는 것이 통념일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정착생활을 하면서 가둠의 개념이 구조화됨으로써 아궁이, 항아리, 집, 마을, 공동체 등등 훌륭한 소통과 발효의 산물들이 생겨난 것 외에도 사유나 소유의 개념들도 생겨났을 것이다. 무기의 발달은 그 후자의 개념을 촉진했을 것이다. 수평적인 분리 외에도 수직적인 분리의 개념이 생겨나거나 강화되었을 것이다. 힘이 센 소수가 독점하자 그 탐욕스런 닫힌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프랑스 혁명도 저 아득한 시절의 가둠의 관념과도 이어질 것이다. 러시아 혁명도 마찬가지이고 승자독식의 지금의 신자유주의 체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큰 줄기 외에도 재산이니 상속이니 결혼이니 가둠의 관념과 연관된 것들이 한둘이겠는가. 인류사는 복잡한 인간들 간의 관계에 의해 복잡하게 굴러갈 수밖에 없기에 긍정적인 가둠과 부정적인 가둠이 뒤섞일 것이다. 복잡한 세부 논의가 뒤따라야 하겠지만 대강 피상적으로 말하자면 부정적인 가둠 속에선 질식과 폭력, 죽임, 부패가 난무한다. 발효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부패 구조에 대해 큰 그림으로만 에둘러 말하면 그렇게 말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상고 시대부터 발효의 문화가 강한 나라였다. 그러던 것이 어느 샌가 부패의 나라가 되어 썩은 내음이 진동한다. 요즘 상황을 보면 더욱 개탄스러우며 분노가 들끓는다. 극단까지 치달은 부패를 발효로 되돌려놓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길이며 사명이며 보람이다. 가야금, 아쟁 소리, 간이 잘 배인 음식, 우리들의 DNA와 무의식 속에 고이 담겨진 발효의 가치...그윽한 간장맛 나는 그것들을 원형대로 되살릴 때이다. 꽉 닫아 가둔채 상대방의 가슴에 못질을 치는 저급한 뒤주 문화를 집어치우고 햇볕 잘 받는 곳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항아리 문화로 되돌아 가자. 모두의 꿈이 각자의 고유한 내면 속에서 잘 발효되도록 말이다. 



"[뫼비우스 단상] 발효를 위한 소통의 미학. 항아리 다시 보기", <뉴스핌>, 2016-11-09, (http://www.newspim.com/news/view/20161109000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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